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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야로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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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카야로 해산은 1953년 2월 28일,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의원 니시무라 에이이치에게 "바카야로"라고 발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의원이 해산된 사건을 말한다. 이케다 하야토 통산대신의 실언과 여야 갈등 심화가 배경이 되었으며, 요시다의 발언 이후 징계안 가결,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정치인의 발언과 책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요시다 내각의 몰락과 정치적 영향력 감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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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야로 해산
바카야로 해산
개요
정의일본의 정치 용어로서, 내각이 중의원을 해산하는 것
어원바카야로 (일본어 욕설)와 해산 (중의원 해산)의 합성어
유래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해산 권한을 남용하여 "바카야로!"라고 발언한 것에서 유래
역사
1953년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중의원 해산 (바카야로 해산)
배경요시다 총리가 국회에서 질의 중인 야당 의원을 향해 "바카야로!"라고 발언한 것이 발단
결과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었지만, 요시다 총리가 중의원을 해산하며 위기 모면
관련 인물
주요 인물요시다 시게루
소속자유당
관련 사건
직접적 관련 사건1953년 중의원 해산 (바카야로 해산)
관련 사건불신임 결의안 제출
기타
특징총리의 권한 남용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인식
영향이후 일본 정치에서 총리의 해산권 행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형성
논란총리의 권한 남용과 국회 무시라는 비판이 존재

2. 배경

1953년 2월 28일, 제15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니시무라 에이이치 (사회당 우파) 의원 간 질의응답 중, 요시다가 니시무라에게 "바카야로(バカヤロー)"라고 발언한 것이 이 해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는 요시다가 자리에 앉으면서 매우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ばかやろう)"라고 중얼거렸을 뿐인데, 우연히 마이크가 이 소리를 잡아 니시무라가 따져 물으면서 소동이 커졌다.

바카야로 해산의 근본 원인은 요시다 내각의 이케다 하야토 통상산업대신(경제산업대신)에게 있었다.[3] 이케다 하야토의 잦은 실언으로 야당으로부터 통상산업대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고, 궁지에 몰린 요시다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계속되는 질문 공세에 해당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3]

2. 1. 이케다 하야토 통산대신의 실언

이케다 하야토 통산산업대신은 "중소기업의 일부 도산도 어쩔 수 없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쌀을,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리를 먹는다는 식의 경제 원칙에 따라 가는 것이 좋다" 등 여러 차례 문제 발언을 하여 야당으로부터 통상산업대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다.[3] 이러한 발언들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2. 2. 여야 갈등 심화

吉田茂|요시다 시게루일본어 내각의 실정과 池田勇人|이케다 하야토일본어 대신의 실언은 야당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3] 이케다는 "중소기업의 일부 도산도 어쩔 수 없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쌀을,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리를 먹는다는 식의 경제 원칙에 따라 가는 것이 좋다" 등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하여 야당으로부터 통상산업대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다.[3] 이는 결국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로 이어졌다.

3. 경위

1953년 2월 28일, 제15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니시무라 에이이치 의원 간의 질의응답 도중 '바카야로' 발언이 나왔다.[3] 이 발언은 요시다 시게루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지만, 마이크에 잡혀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은 이케다 하야토 통상산업대신의 "중소기업의 일부 도산도 어쩔 수 없다"는 등의 발언으로, 야당으로부터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된 상황이었다.[3] 궁지에 몰린 요시다 시게루가 예산위원회에서 집요한 질문에 해당 발언을 한 것이다.

3. 1. 요시다 시게루의 '바카야로' 발언

1953년 2월 28일, 제15회 국회 중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사회당 우파의 니시무라 에이이치 의원 간의 질의응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가 니시무라에게 "바카야로(바카야로)"라고 발언한 것이 이 해산의 계기가 되었다.[3]

"바카야로"라고 쓰면 큰소리로 외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요시다가 자리에 앉으면서 매우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ばかやろう)"라고 중얼거린 것이었다. 이것을 우연히 마이크가 잡아, 그 사실을 알게 된 니시무라가 따져 물었기 때문에 소동이 커졌다.

요시다와 니시무라의 질의응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표기는 가나 없이 읽기를 제외하고 의사록에 따른다).

니시무라"총리대신께서 지난 시정연설에서 말씀하신 국제정세는 낙관해야 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요시다"저는 국제정세를 낙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위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총리 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자신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영미의 수뇌부가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니시무라"저는 일본국 총리대신에게 국제정세 전망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총리의 번역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총리의 낙관론 혹은 외국의 총리의 낙관론이 아니라, 일본 국민은 일본 총리대신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국제정세 전망과 그 대책을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시다"방금 제 답변은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드린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니시무라"총리대신께서는 흥분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굳이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시다(무례한 말씀입니다)
니시무라"무엇이 무례입니까."
요시다(무례하지 않습니까)
니시무라"질문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례입니까. 당신의 말이 무례입니다. 국제정세 전망에 대해, 번역된 말을 하지 말고,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하라는 것이 무엇이 무례입니까. 답변할 수 없습니까, 당신은……."
요시다
니시무라"무엇이 바카야로입니까.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이것을 취소하지 않는 한,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의원을 붙잡고, 국민의 대표를 붙잡고,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취소하십시오. 저는 오늘 조용히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을 제 말에 흥분할 필요가 있습니까."
요시다"…… 제 말은 부적절했습니다. 분명히 취소합니다."
니시무라"나이 일흔이 넘어 일국의 총리대신이 된 사람이 취소한 이상, 저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대립했다고 해서 의원을 바카야로라거나, 무례하다거나 의원의 발언에 대해 무례하다거나 바카야로라고 하는 것은, 도조 내각 이상의 파쇼적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답변하십시오."



1953년 2월 2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 회의록(발언 부분은 '―'로 삭제되어 있음)


위 내용 중 "총리대신께서는 흥분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부터 "무엇을 제 말에 흥분할 필요가 있습니까"까지는 니시무라의 한 번의 정규 발언이다. 질문석에서 정규 발언을 하고 있던 니시무라에게 요시다가 자리에서 끼어들듯이 불규칙 발언을 했고, 서로 상대의 발언에 반응하여 언쟁을 벌인 것이다.

요시다 시게루는 발언 당시에는 "실수로 마이크에 들어갔다"며 풀이 죽었지만, 며칠 후에는 기운을 되찾아 "앞으로도 가끔 실언을 할지도 모르니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여유로운 연설을 하기도 했다.

요시다와 니시무라의 관계는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요시다는 친영미파로서 일본군의 눈총을 받아 헌병에 구금당하기도 했다. 반면 니시무라는 군인들과의 관계가 깊어 전시 중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요시다는 니시무라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고, 이것이 "바카야로 발언"의 한 원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두 사람의 흥분한 설전 후 회의장이 조용해졌고, 그 와중에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인 요시다는 "실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정중하게 발언을 취소했다[4]"라고 적혀 있다. 이로부터 요시다의 심정은 "긴장으로 인한 어색한 웃음과 과한 발언에 대한 후회가 뒤섞였다[5]"는 복잡한 심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시다가 발언을 취소했기 때문에, 회의록에서는 니시무라와 요시다가 발언한 "무례한"과 "바카야로"라는 단어가 각각 '―― 및 ―'로 삭제되어 있다.

3. 2.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항의와 발언 취소

1953년 2월 28일, 제15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사회당 우파 니시무라 에이이치 의원 간의 질의응답 중 요시다 총리가 니시무라 의원에게 "바카야로(바보 녀석)"라고 발언했다.[3] 요시다 총리는 자리에 앉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ばかやろう)"라고 중얼거렸지만, 마이크가 이 소리를 잡아냈다. 니시무라 의원이 이를 따져 묻자 소동이 커졌다.[3]

문제가 된 요시다와 니시무라의 질의응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꺾쇠 괄호는 정규 발언, 둥근 괄호는 불규칙 발언, '''굵은 밑줄'''은 발언 취소로 삭제된 부분).

발언자내용
니시무라"총리대신께서 지난 시정연설에서 말씀하신 국제정세는 낙관해야 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요시다"저는 국제정세를 낙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위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총리 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자신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영미의 수뇌부가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니시무라"저는 일본국 총리대신에게 국제정세 전망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총리의 번역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총리의 낙관론 혹은 외국의 총리의 낙관론이 아니라, 일본 국민은 일본 총리대신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국제정세 전망과 그 대책을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시다"방금 제 답변은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드린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니시무라"총리대신께서는 흥분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굳이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시다(무례한 말씀입니다)
니시무라"무엇이 무례입니까."
요시다(무례하지 않습니까)
니시무라"질문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례입니까. 당신의 말이 무례입니다. 국제정세 전망에 대해, 번역된 말을 하지 말고,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하라는 것이 무엇이 무례입니까. 답변할 수 없습니까, 당신은……."
요시다(바카야로)
니시무라"무엇이 바카야로입니까.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이것을 취소하지 않는 한,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의원을 붙잡고, 국민의 대표를 붙잡고,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취소하십시오. 저는 오늘 조용히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을 제 말에 흥분할 필요가 있습니까."
요시다"…… 제 말은 부적절했습니다. 분명히 취소합니다."
니시무라"나이 일흔이 넘어 일국의 총리대신이 된 사람이 취소한 이상, 저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대립했다고 해서 의원을 바카야로라거나, 무례하다거나 의원의 발언에 대해 무례하다거나 바카야로라고 하는 것은, 도조 내각 이상의 파쇼적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답변하십시오."



니시무라 의원은 요시다 총리의 발언에 대해 즉각 항의했고, 요시다 총리는 "제 말이 부적절했습니다. 분명히 취소합니다."라며 발언을 취소했다. 회의록에는 니시무라와 요시다가 발언한 "무례한"과 "바카야로"라는 단어가 '―― 및 ―'로 삭제되어 있다.

3. 3. 질의응답 전문

문제가 된 요시다와 니시무라의 질의응답 내용은 다음과 같다(표기는 가나 없이 읽기를 제외하고 의사록에 따른다). 꺾쇠괄호는 정규 발언(거수하여 위원장에게 발언 허가를 요청하고, “**군”, “내각총리대신”이라고 위원장에게 지명받은 후 질문석 또는 답변석에서 발언), 둥근괄호는 불규칙 발언(위원장의 발언 허가 없이 자리에서 함부로 발언), '''굵은 밑줄'''은 발언 취소로 의사록에서 삭제된 부분이다.

니시무라" 총리대신께서 지난 시정연설에서 말씀하신 국제정세는 낙관해야 한다는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요시다"저는 국제정세를 낙관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위험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영국의 총리 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자신도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영미의 수뇌부가 말씀하셨으니 저도 그렇게 믿은 것입니다. "
니시무라"저는 일본국 총리대신에게 국제정세 전망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영국 총리의 번역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 총리의 낙관론 혹은 외국의 총리의 낙관론이 아니라, 일본 국민은 일본 총리대신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국제정세 전망과 그 대책을 말씀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시다"방금 제 답변은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드린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니시무라"총리대신께서는 흥분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굳이 흥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요시다(무례한 말씀입니다)
니시무라"무엇이 무례입니까."
요시다(무례하지 않습니까)
니시무라"질문하고 있는데 무엇이 무례입니까. 당신의 말이 무례입니다. 국제정세 전망에 대해, 번역된 말을 하지 말고,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답변하라는 것이 무엇이 무례입니까. 답변할 수 없습니까, 당신은……."
요시다(바카야로)
니시무라"무엇이 바카야로입니까.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이것을 취소하지 않는 한, 저는 듣지 않겠습니다. 의원을 붙잡고, 국민의 대표를 붙잡고, 바카야로는 무슨 소리입니까. 취소하십시오. 저는 오늘 조용히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을 제 말에 흥분할 필요가 있습니까."
요시다"…… 제 말은 부적절했습니다. 분명히 취소합니다."
니시무라"나이 일흔이 넘어 일국의 총리대신이 된 사람이 취소한 이상, 저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의견이 대립했다고 해서 의원을 바카야로라거나, 무례하다거나 의원의 발언에 대해 무례하다거나 바카야로라고 하는 것은, 도조 내각 이상의 파쇼적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답변하십시오. "



위의 내용 중 후반부 “총리대신께서는 흥분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부터 “무엇을 제 말에 흥분할 필요가 있습니까”까지는 니시무라의 한 번의 정규 발언이다. 질문석에서 정규 발언을 하고 있던 니시무라에게 요시다가 자리에서 끼어들듯이 불규칙 발언을 했고, 서로 상대의 발언에 반응하여 언쟁을 벌인 것이다.

요시다가 발언을 취소했기 때문에, 회의록에서는 니시무라와 요시다가 발언한 "무례한"과 "바카야로(バカヤロー)"라는 단어가 각각 '―― 및 ―'로 삭제되어 있다.

4. 결과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바카야로" 발언은 징계사범 동의 가결과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로 이어졌다.[3] 3월 2일 징계위원회 회부 동의안 표결에는 자유당 비주류파와 개진당 일부, 주류파였던 히로카와 고젠 등이 결석하여 가결되었고, 3월 14일 내각 불신임 결의안은 자유당 하토야마파 30명 이상이 탈당하여 찬성함으로써 가결되었다. 결국 요시다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 4월 19일에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3]

4. 1. 징계사범 동의 가결

사회당 우파는 요시다 총리의 발언을 의회 경시로 간주하고 요시다를 “의원으로서의 징계사범”에 해당한다며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는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타케키치 등 자유당 비주류파의 책략이었다고 한다.[3] 3월 2일 표결에서 자유당 비주류파뿐만 아니라 야당인 개진당에서 요시다 측과 협조 자세를 보였던 오아사 유오 등의 일파가 결석하여 동의안 가결이 미묘하게 여겨졌지만, 주류파로 여겨졌던 히로카와 고젠(농상) 등의 일파도 결석(이 결석으로 히로카와는 농상직에서 파면당했다)했기 때문에 징계위원회 회부 동의안은 가결되었다.[3] 이후 징계위원회는 열렸지만, 위원회 결의는 나오지 않은 채 중의원 해산으로 폐안되어 본회의장에서의 징벌은 없었다.[3]

4. 2. 내각 불신임 결의안 가결

1953년 3월 2일, 사회당 우파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바카야로" 발언을 의회 경시로 보고 "의원으로서의 징계사범"에 해당한다며 징계위원회 회부 동의를 제출했다.[3] 이 배경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미키 타케키치 등 자유당 비주류파의 책략이 있었다고 한다. 표결에는 자유당 비주류파뿐만 아니라 야당인 개진당에서 요시다 측과 협조 자세를 보였던 오아사 유오 등의 일파가 결석했다. 주류파로 여겨졌던 히로카와 고젠(농상) 등의 일파도 결석하여(히로카와는 이 때문에 농상에서 파면당했다) 징계위원회 회부 동의는 가결되었다.[3] 이후 징계위원회는 열렸지만, 위원회 결의 없이 중의원 해산으로 폐안되어 본회의 징계는 없었다.

이어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었고, 앞선 징계사범 동의 표결에서 결석했던 자유당 하토야마파 30명 이상이 탈당하여 불신임안에 찬성, 3월 14일에 가결되었다.

4. 3. 중의원 해산 및 총선거

1953년 3월 14일, 내각 불신임 결의가 가결되자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3] 이에 따라 같은 해 4월 19일에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3]

5. 영향 및 평가

요시다 시게루는 '바카야로 해산'으로 인해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정권 교체의 위기를 맞았다. 해산 후 총선거에서 요시다가 이끄는 자유당은 대패하여 간신히 정권을 유지했지만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다.

히로카와 고젠의 배신에 대해 요시다는 "스님은 3대에 걸쳐 원한이 남는다"라는 유머 섞인 비꼬는 표현을 사용했다.

요시다와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관계는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요시다는 친영미파로서 일본군(특히 대일본제국 육군)의 눈총을 받아 헌병에게 일시 구금되기도 했다. 반면 니시무라는 군과의 관계가 깊어 전시 중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요시다는 니시무라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고, 이것이 "바카야로 발언"의 한 원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두 사람의 설전 후 회의장이 조용해졌고,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인 요시다는 "실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정중하게 발언을 취소했다[4]"고 한다. 이는 요시다의 복잡한 심경을 짐작하게 한다.[5]

요시다가 발언을 취소했기 때문에, 회의록에는 니시무라와 요시다가 발언한 "무례한"과 "바카야로"라는 단어가 '―― 및 ―'로 삭제되어 있다.

5. 1. 요시다 내각의 몰락

1953년 3월 14일, 내각 불신임 결의안이 가결되자 요시다 시게루는 중의원을 해산했다. 이후 4월 19일에 실시된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요시다가 이끄는 자유당은 대패하여 간신히 정권을 유지했지만,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요시다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졌고, 이는 결국 요시다의 사퇴로 이어졌다.

말년에 요시다는 회고록에서 "사소한 말꼬리를 잡고" 불신임안에 동조한 여당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당시 일어났던 많은 이상한 일들" 중 가장 큰 것으로 "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5. 2. 정치인의 발언과 책임

이 사건은 정치인의 발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발언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1953년 2월 28일, 제15회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요시다 시게루가 니시무라 에이이치 의원과의 질의응답 중 "바카야로(바보 녀석)"라고 발언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중의원이 해산되었기 때문이다.[3]

하지만 실제로는 요시다가 자리에 앉으면서 매우 작은 목소리로 "바카야로"라고 중얼거렸을 뿐이며, 그것을 우연히 마이크가 잡아, 그 사실을 알게 된 니시무라가 따져 물었기 때문에 소동이 커졌다는 것이 실제 상황이다.

"바카야로 해산"의 근본 원인은 요시다 내각의 통상산업대신(경제산업대신) 이케다 하야토에게 있었다.[3] 이케다 하야토는 "중소기업의 일부 도산도 어쩔 수 없다", "소득이 많은 사람은 쌀을, 소득이 적은 사람은 보리를 먹는다는 식의 경제 원칙에 따라 가는 것이 좋다" 등 여러 차례 문제 발언을 하여 야당으로부터 통상산업대신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다. 궁지에 몰린 요시다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의 집요한 질문에 해당 발언을 연발한 것이다.[3]

요시다 시게루조차도 발언 당시에는 "실수로 마이크에 들어갔다"며 풀이 죽었지만, 며칠 후에는 기운을 되찾아 회합에서 "앞으로도 가끔 실언을 할지도 모르니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여유로운 연설을 했다.

요시다와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관계는 이전부터 좋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요시다는 친영미파로서 일본군(특히 대일본제국 육군)의 눈총을 받아 일시적으로 헌병(일본군)에 신병을 구금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반대로 니시무라는 군인들과의 관계가 깊어 전시 중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요시다는 니시무라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이것이 "바카야로 발언"의 한 원인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두 사람의 흥분한 설전 후 회의장이 조용해졌고, 그 와중에 오카자키 가쓰오 외무대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인 요시다는 "실소를 지으며 일어서서 정중하게 발언을 취소했다[4]"라고 적혀 있다. 이로부터 요시다의 심정은 "긴장으로 인한 어색한 웃음과 과한 발언에 대한 후회가 뒤섞였다[5]"는 복잡한 심경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산 후 총선거에서 요시다가 이끄는 자유당은 대패하여 간신히 정권을 유지했지만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고, 요시다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졌다. 이것이 요시다의 사퇴로 이어진다. 말년에 요시다는 회고록에서 "사소한 말꼬리를 잡고" 불신임안에 동조한 여당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당시 일어났던 많은 이상한 일들" 중 가장 큰 것으로 "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5. 3. 한국 정치에 주는 시사점

바카야로 해산은 일본 정치에서 막말과 실언이 정치 생명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사건은 한국 정치인들에게도 언행의 중요성과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민을 존중하고 책임감 있는 언행을 하는 정치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정치인의 말 한마디는 단순한 발언을 넘어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곧 정치적 신뢰와 직결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참조

[1] 뉴스 解散のあとさき 本社政治部記者の座談会_解散 朝日新聞 1953-03-16
[2] 뉴스 ○○解散 呼び名を各界に聞きました(どこへ 96年秋・新選挙) 朝日新聞 1996-09-26
[3] 서적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
[4] 뉴스 (제목 없음) 朝日新聞 1953-03-01
[5] 서적 戦後政治家暴言録 中央公論新社 2005
[6] 뉴스 解散のあとさき 本社政治部記者の座談会_解散 朝日新聞 1953-03-16
[7] 뉴스 ○○解散 呼び名を各界に聞きました(どこへ 96年秋・新選挙) 朝日新聞 1996-09-26
[8] 서적 豪閥 地方豪族のネットワーク 立風書房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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